한국을 떠나면서 앞으로의 뉴질랜드 삶을 상상해 봤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겠지만 Go with the flow 마음가짐으로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겨 보겠노라 다짐했다. 그리고 그동안의 뉴질랜드 생활을 돌이켜봤을 때 흘러가는 대로 살아온 건 맞는 거 같은데 그 물살은 마치 계곡 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꽤 평온한데? 싶다가도 갑자기 물줄기가 틀어지고, 거센 물살에 이리저리 휩쓸리기도 하고, 난데없이 푹 빠져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도 들고, 그러다가 또다시 졸졸졸 잔잔하고. 아마 해외살이를 시작한 모든 이방인, 또는 한국에서 무언가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도전하는 이들이라면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치열하게 거슬러 올라가는 삶도 그 삶대로의 어려움이 있지만,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삶도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쉽지만은 않다. 뉴질랜드에 온 지도 1달하고도 반이 지난 지금, 오늘은 초기 정착부터 일자리를 구해 일상을 살아가며 겪은 여러 상황 속에서 마음을 다잡는 데에 도움이 되었던 생각들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1. ‘이럴 줄 몰랐지 뭐’ - 후회와 자책을 막아주는 말
한국에서 같이 모은 돈을 뉴질랜드 돈으로 입금하는 과정에서 생긴 문제, 찾는 과정부터 고르는 순간까지 아주 순탄치만은 않았던 플랫 구하기, 둘에게 모두 처음이었던 바닷가 태닝을 잘못된 방법으로 해서 매일 밤 따가운 몸을 수딩 스프레이로 진정시켜야 했던 날들 등등. 조금만 더 빨리 할걸, 더 찾아볼걸, 예전에 이런 걸 좀 해볼걸 등등 ‘~할 걸’ 뫼비우스의 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이럴 줄 몰랐지 뭐 알았으면 이렇게 안 했겠지 뭐’ 하고 툭 끊어버리는 것이다. 완벽한 초심자이자 이방인인 우리가 지금 가질 수 있는 여유는 완벽한 초심자와 이방인만이 가질 수 있는 ‘이제 알았으니 됐다’ 하는 여유뿐이기 때문에.
2. ‘적어도 시도했다, 또는 배웠다’ - 낙심과 좌절에서 끌어올려 주는 말
일을 구하면서 여러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구직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얼굴을 마주했다. 지금은 사람을 안 뽑는다는 안타까운 얼굴, CV 있으면 두고 가라는 무심한 얼굴, 뉴질랜드 경력 있는 사람만 뽑는다는 ‘그러니까 너는 안돼’ 얼굴, 일단 한번 봐보자며 내게 기대를 거는 얼굴. 그 얼굴들 앞에 선 나는 여러 번 작아지고, 떨리고, 덥석 받은 기회에 ‘지금? 당장? 과연? 내가?’ 오만 부담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렇게 여러 문턱들을 넘나들면서 적어도 나는 여기서 살아남으려고 시도하고 있다며 스스로를 토닥였다. 그러다 ‘그저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어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얼굴에 철판이라도 두꺼워지면 그것만으로도 얻은 게 있는 게 아닐까, 그 철판이 언젠가 나를 지켜주는 날도 오겠지 하며 무거워지는 마음을 계속해서 끌어올렸다. 그리고 실제로 그 시도 끝에 일자리도 얻어냈다.
요즘 일하다 보면 몇 주 전 나와 같이 긴장되는 얼굴을 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최대한 그들에게 ‘당신의 시도를 응원한다’는 눈빛을 전달하려고 한다. 그대 잘하고 있다!
3. ‘일단 웃어’ - 사회성이 필요할 때 떠올리는 말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적응을 하기도 전인데 갑자기 바빠져서 허둥지둥거렸던 적이 있다. 그때 보스가 ‘주문이 많이 밀려있는데 손님은 빨리 받고 싶은 눈빛을 보낼 때, 마냥 그 손님을 기다리게 하기보다는 해야 되는 걸 하면서 한번 One Second 😄, 더 길어지게 되면 또 One Second 😄 하면서 지금 당신을 위해서 내가 무언갈하고 있다는걸 티내봐. 게다가 너는 웃는 상이니까 괜찮을거야. 약간 소름 돋아할지도?’하고 얘기해 준 적이 있다. 사실 한국이면 말 걸 시간에 최대한 빨리해서 주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여기서는 웃으면서 ‘좀만 기다려줘봐~ 지금 하고 있어~ 근데 오늘 하루 어때~’ 하는 게 더 최선이라니. 아직은 어색하지만 키위가 직접 준 조언이니까 받아들이기로 하고 한 번씩 시도해보는데 꽤나 잘 먹힌다! - 물론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뭐든 사람을 잘 봐가면서 해야 한다 -
사람마다 자기 자신에게 잘 맞는 사회적 얼굴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에게는 그 얼굴이 웃는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억지로 지어내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도 편하고, 타인과 상황도 풀어낼 수 있는 보호색 같은 얼굴. 그 얼굴을 알고 있는 건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무기가 된다.
문득 일을 하다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게 된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이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는데 사실 그 방식은 언제나 동일할 수가 없다.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그에 필요한 마음 상태를 유지하기. 그렇게 유연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을 때 자기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마음의 유연한 상태를 유지하길 바라며 오늘도 이곳에서의 삶을 이어가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