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인 삶을 산다고 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는가? 맑은 하늘 아래 에메랄드빛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모래사장에 누워서 원하는 만큼 햇볕을 쬐고, 비치타올로 몸을 감싼 뒤 과일이 통째로 갈려 들어간 요거트 아이스크림콘을 먹고, 제일 친한 친구와 나란히 누워 대화를 나누고. 상상만 해도 낭만이 철철 흘러넘치고, 그런 삶이라면 천년만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뉴질랜드에 와서 일을 구하기 전 그 삶이 계속될수록 마음속 한 편에서는 ‘이제 일상을 살고 싶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하는 마음이 커져가기 시작했다.
본투비 외향형 인간인 나는 어느 정도 자연 속 휴식 시간을 통해 충분한 에너지를 회복한 이후에는 사람들을 만나서 어울리고, 생산적인 활동을 하며 사회적 효능감을 느끼는 게 필요하다는 걸 이곳에 와서 더 크게 깨달았다. 더 이상 뉴질랜드의 대자연 속 휴식이 낭만이 아닌 지루함으로 느껴질 때 즈음 원래의 계획인 키위프룻 시즌잡이 아닌 좀 더 이곳의 일상에 녹아들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보기로 결심했고 빠르게 CV(이력서)를 수정한 다음 거의 20장에 달하는 종이뭉치를 들고 일을 구하기 위한 여정을 떠났다.
그날은 본격적으로 자칭 ‘내가 일 구한다는 걸 동네방네 다 소문내는 날’로 정한 날이었다. 손바닥 2개를 합친 크기의 휘테커스 거대 초콜릿바까지 사들고 당차게 나섰지만 막상 가게에 무작정 들어가서 (1) 환하게 웃으며 인사 (2) 혹시 사람을 뽑고 있는지 파악 (3) 사실 지금 뽑든 안 뽑든 상관없이 CV라도 두고 갈 수 없는지 자연스레 물으며 (4) 나를 어필하는 멘트 날리기를 하려니 한 곳 한 곳 문턱을 넘어서기까지 여러 번의 심호흡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기죽지 말라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일부러 더 씩씩하게, 더 환하게 웃으면서 나의 일상이 될 수도 있을 곳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준비한 CV도, 찾아둔 가게 리스트도, 또 체력도 다 떨어져갈 때 즈음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뙤약볕 아래에 몇 시간을 걸어 다니느라 녹초가 된 몸과 마음이라 분명 얼른 저녁을 먹고 쉬어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는데, 저녁을 먹고 난 뒤 침대에 누웠을 때 ‘노을 지는 하늘 아래 파도 소리를 들어야만 오늘을 끝낼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번쩍하고 찾아와 그길로 뛰어나가 시동을 걸었다. 해변으로 향하는 내내 마치 구름을 타고 달리는 것처럼 두둥실 몸이 떠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신나는 드라이브 노래, 뻥뻥 뚫린 도로, 내가 좋아하는 친구, 서서히 노란빛으로 변해가는 하늘, 오늘의 몫을 너무나도 잘 살아냈기에 그 어떠한 찝찝함도 없는 마음 상태. 정말 오랜만에 머릿속에 낭만이라는 단어가 노을처럼 물드는 순간이었다.
해변에 도착하기 전 우연히 발견한 나이트 마켓에서 잔디밭에 앉아 라이브 뮤직을 듣는데, 문득 낭만은 현실이 있어야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내가 오늘 하루 종일 뉴질랜드의 경이로운 자연 속에 둘러싸여 휴식을 취했다면 노을을 보고 하루를 끝내고야 말겠다는 이렇게 강한 충동을 느낄 수 있었을까? 현실에 치이고 불안한 상황이 여전히 싫지만 그래도 그 지침과 불안이 결국에는 내게 현실을 잠시 벗어나라는 낭만의 바람을 분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더 큰 낭만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때론 낭만적일 어떤 것을 찾아 나서기 보다 현실을 더 열심히 살아내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의 꼬리들이 이어졌고 이제는 정말 어느 때보다도 현실적이었던 오늘 하루를 노을과 함께 낭만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함께 회사 생활을 했던 동료가 떠오른다. 그 누구보다도 낭만을 추구하는 그녀는 사실 아주 현실적인 사람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낭만’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유는 낭만과 현실은 나란하게 붙어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현실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틈틈이 부지런히 큰 낭만을 찾아 나서는 그녀가 참 좋았다.
세상에는 절대적인 한 가지 방법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때론 이게 맞을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어떻게 하면 더 낭만적인 삶을 살 수 있을지 고민 중이라면 한번 오늘 하루를 열심히, 정말 열심히 - 몸과 마음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선에서 - 살아보는 건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