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는 지금은 마웅가누이산이 보이는 오투모이타이의 한 공원 잔디밭에 앉아 있다. 낭만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몇 분 전 플랫 뷰잉을 마치고 잡힐지 잡히지 않을지 모르는 다음 플랫 뷰잉을 위해 기다리는 중이다. 어떻게 보면 그 사이 시간을 공원에 앉아 글을 쓰며 보내고 있기 때문에 낭만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오늘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뜨는데 ‘아, 뉴질랜드에 온 지 벌써 2주가 지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뉴질랜드는 해가 빨리 뜨고, 6~7시면 사람들이 직장에 도착한다고 하니까 우리나라보다 3~4시간은 빠르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9시까지 침대에 누워 있는 건 한국에서 해가 중천이 되도록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니 ‘여기까지 와서 뭐 하고 있는 거지!’ 하며 몸을 일으켜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는 동안 지난 2주를 돌이켜봤다. 일단 갑작스러웠던 비행기 취소 문제를 잘 해결해서 입국까지 마쳤고, 이곳에서의 운전에 익숙해지기 위해 운전 연수도 들었으며, 우리가 타고 다닐 차도 구했다. 어쩐지 너무 순탄하다 싶었던 차 구하기 과정 중에 마주친 송금 문제로 속이 까맣게 타기도 했지만, 결국 해결해서 잔금도 치르고 보험도 넣은 뒤 오클랜드를 떠나 200km를 달려 타우랑가에 도착했다.
그리고 요 며칠은 앞으로 머무를 집 뷰잉을 다니면서 이 동네는 우리의 여가 생활을 즐길 공원이 가깝네, 주민들의 분위기가 좋네, 이 집은 채광이 끝내주고 공간 자체가 너무 좋은데 어떤 부분은 아쉽네, 여기는 주차를 하기가 좋네, 마네 등등 이곳에서의 우리의 삶을 그리고 현실적인 부분을 따져 가면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오랜 친구와 함께 와서 좋은 점 중 하나는 공강 시간에 어디에 가 있네, 더 놀다가 누구네 자취방에서 자고 가네, 마네 했던 대화의 주제가 10년이 흐른 지금, 앞으로 타고 다닐 차와 살아갈 집 같이 조금 더 어른스러운 주제로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오묘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철부지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내가 그렇게 많이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어른의 과제들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는 그럴 때가 된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제는 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때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가 되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들을 마주하고 해결해 나가면서 한순간도 지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쉽게만 살아가고 싶고, 플랜 A대로만 일이 다 풀렸으면 좋겠고, 누가 대신 처리해 주면 좋겠고, 언제나 확률이 100%였으면 좋겠고, 모두가 우리를 환영하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솔직히 들었다. 영국으로 교환학생을 떠났을 때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타지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삶을 다 스스로 만들어 가야 했기에 수많은 가능성과 그만큼의 불확실함을 마주해야만 했다. 이게 아니면 어쩌지? 내게 있었던 또 다른 선택지가 더 좋은 선택이었다면 어쩌지? 하는 What if로 가득해지는 마음에 불안해지고 예민해지는 나를 여러 번 다독여 잠재워야만 했다.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022)를 보다 보면 살아오면서 겪은 모든 후회와 실망이 지금으로 이끌었다는 대사가 초반에 나온다. 요즘 들어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어른이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있을 수 없고, 결국은 어른이 ‘되어 가다가’ 언젠가 내가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을 보내면서 새로운 세상을 마주치기도 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직면해야 하고, 그러다가 마주친 잠깐 멈추고 싶은 순간에 고개를 들고 멍하니 바라보며 복잡함을 비워 내거나 정리할 줄도 아는 것. 그렇게 필연적으로 뒤따를 후회와 실망, 하지만 그 속의 낭만과 기쁨을 느끼면서 살아내는 것이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인 것 같다. 그렇게 조금 더 정교하고, 노련하고, 그럼에도 아직 연약함이 남아있는 직관을 가지게 되는 것이 그 과정을 지나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성장이지 않을까 싶다.
어른을 떠올렸을 때, 예전에는 시선이 위로 향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앞과 안으로 향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어떤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어른’일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곳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지, 거기까지 도달할 수는 있을지, 그렇게 되면 살아가는 게 편할지 하는 막연하고 거대한 불안감에 휩쓸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앞과 안을 향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어른’은 왠지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살아가는 곳과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그 안을 살아가는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잘 살피면 되는 거겠구나. 어떤 위치에 올라가려고, 또는 무언가가 되려고 애쓰는 것이 어른이 되는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지금 이곳에서 내 안을 살펴보았을 때 발견할 수 있었다.
문득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인 메리 올리버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나서 그 구절로 레터를 마무리해 본다.
Could anyone figure it out, to a finality?
So why spend so much time trying. You fuss, we live.
And he stood, slowly, for he was old now, and ambled away.
메리올리버, 천 개의 아침 ‘Good-bye Fox’ |